예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 중 몇 가지만 하지 않으셨더라면 나는 훨씬 더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거의 모든 경우) 실천할 수 있는 명령이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여기까지만 말씀하셨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한 가지를 추가하셔야만 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첫 번째 계명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언제 우리가 이웃에게 관심을 가졌던가?
나는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공감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누가 내 이웃인가?
예수님께서는 대답 대신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이야기에는 삶과 생각을 바꾸는 힘이 있다. 예수님은 신학적, 이념적, 철학적 논의에 갇히기보다 청중들이 잘 알았던 위험천만했던 길에 관해 이야기하신다.
당연히 이 좁은 길을 지나다 강도를 만나 맞은 채 누워있는 사람이 나온다.
제사장은 의도적으로 다른 쪽 길로 걸어 강도 만난 그 사람을 피해 지나간다.
그리고 레위인(당시 종교 지도자) 하나도 제사장과 똑같이 한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등장하고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아픈 곳을 싸매주고, 자기 나귀에 실어 근처 숙박 시설에 데려간다. 사마리아인은 숙박 시설 사장에게 이틀 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내고 아픈 이를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치료와 돌봄에 드는 추가 비용이 있다면 그가 돌아와서 계산하겠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그저 지나치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친절과 긍휼로 대해야 한다고 적용한다.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에 익숙하기에 이 단어를 두 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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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땅콩”이라는 말이 “버터”라는 말과 잘 어울리듯, “선한”이라는 말은 “사마리아인”이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지 않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점을 놓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결론으로, “네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신다.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말했으면 더 간단하지 않았을까?
물론이다. 단어 수도 적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율법 교사를 비롯한 다른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에게는 아무런 선한 것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들은 기껏해야 피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결코 사마리아인과 함께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 교사가 “사마리아인”이라는 표현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이유다. 대신 그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종종 이전에 사귀었던 사람들을 그들의 이름이 아닌 “엑스(전 남친, 전 여친)”라고 부른다.
혹은 이웃에 사는 그를 부를 때는 “그놈들”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우리를 더 큰 개념과 연결한다. 이름은 친밀함을 불어넣는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생각해보라.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이 네 이웃이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하시는 그 사람이다.
우리의 이웃은 그저 우리가 잘 지내는 사람들이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 같은 후보나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 쉽게 사랑하거나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웃은 또한 우리를 화나게 하고,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들,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싫은 바로 그 사람들도 포함한다.
정곡을 찔렸다.
예수님께서 주신 원수를 없애는 해법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고(진심으로 그들이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 그들을 사랑하다 못해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서는 그들이 더 이상 내 원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이 “선한” 사람으로 평가된 것은 성경 구절을 많이 외웠기 때문도 아니고, 성전에 자주 올라갔었기 때문도 아니고, 명료한 종교적 언어를 통해 생각이 달랐던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데 능했기 때문도, 기도를 유창하게 잘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사랑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다친 사람을 지나쳤던 이유는 종교적 열심 때문이었다. 사마리아인이 가던 길을 멈추고 사마리아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싫어했을 그 사람을 도운 것은 사랑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적용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 마음의 척도
글쎄. 우선은 내가 속한 공동체 넘어까지 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랑은 “나와 내 것” 그 이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웬델 베리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삶도 상상해야” 한다.
이스라엘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혐오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증오하는 사이였다. 사마리아인의 행동 중 놀라운 것은 그가 다친 사람의 꼬리표보다 도움이 필요한 인간을 먼저 보았다는 점이다.
우리 마음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평안하고 편리한 순간에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어려움과 논쟁의 순간에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평가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듯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위해 우리의 감투, 명성, 사회적 지위를 희생하는 자리까지 나아갈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부르신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내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율법 교사처럼 분석의 마비(paralysis of analysis)에 사로잡히지 않고,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조셉 유는 When the Saints Go Flying in(성도가 날아들 때)의 저자입니다. 그는 서부 해안 출신으로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휴스턴의 모자이크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의 블로그 josephyoo.com에서 그가 쓴 더 많은 글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