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의 숨은 영웅들: 바버라 헥

바버라 헥(Barbara Heck)은 감리교가 미국과 캐나다에 전파되는 데 기여했다. “미국 감리교의 어머니”로 불리는 놀라운 그녀의 이야기는 카드 게임에서 시작되었다.
바버라 헥(Barbara Heck)은 감리교가 미국과 캐나다에 전파되는 데 기여했다. “미국 감리교의 어머니”로 불리는 놀라운 그녀의 이야기는 카드 게임에서 시작되었다.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감리교 역사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요한 이름들도 많다. 감리교의 숨은 영웅들 시리즈는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그들의 삶과 증거가 오늘의 연합감리교회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바버라 헥(Barbara Heck)

너무 좋으면서도 여전히 사실인 이야기들도 있다. “미국 감리교의 어머니”라 불리는 바버라 헥의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연합감리교인들 중 다수는 바버라 헥을 어느 날 밤 남편과 다른 남자들이 카드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성전의 예수님을 생각하며 분노하여 카드를 벽난로에 던져버리고 남편과 친구들이 뉴욕시에 새로운 감리교회를 세우라고 요구한 여성으로 알고 있다.

이 용감하고 경건한 여성은 누구였으며, 왜 미국에 감리교를 전파하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1760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 건너오기 전 헥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녀가 1734년 아일랜드에서, 독일 출신 이민자 가정에 태어났으며, 폴 헥(Paul Heck)이라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 정도다. 헥 부부는 리머릭(Limerick) 지역의 감리교 신도회(society)에서 활동했다.[1]

1760년 헥 부부는 독일계 아일랜드인 집단의 일원으로 뉴욕(여전히 영국의 식민지였던)으로 건너간다.[2] 그곳에서 살던 어느 날, 부부는 베티라는 이름의 노예를 사서 바버라의 가정부로 일하게 했다.[3] 1765년 그들은 아일랜드에서 감리교로 개종하여 지역 설교자로 섬기기도 했던 바버라의 사촌 필립 엠버리를 만났다.[4] 

아일랜드에서는 신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헥 부부와 친구들은 미국에 온 뒤 활발한 감리교 사역을 찾지 못했고 이내 믿음 생활에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바버라는 우연히 남편이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카드놀이를 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이후 유명세를 탄 말을 남긴다.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인들은 도박을 죄로 여겼는데, 하나님을 위해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5]

헥은 아일랜드에서 지역 설교자로 섬겼던 엠버리에게 새로운 신도회를 이끌어 달라고 부탁했다. 바버라의 용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남자들은 곧바로 신도회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엠버리가 신도회의 설교자로 섬기는 동안, 바버라는 적극적으로 다른 여성들을 전도하고 그들을 위한 사역을 조직했다. 이 과정을 도왔던 베티는 다수의 흑인 노예와 해방 노예들을 신도회에 데려왔고, 덕분에 뉴욕의 감리교인들은 초기부터 다인종 공동체로 시작되었다. 

이 신도회는 1768년 맨해튼의 존 스트리트(John Street)에 미국 최초의 감리교회를 세웠다. 뉴욕 신도회는 미국 최초의 신도회는 아니었으나,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모임 중 하나였다. 이곳의 회원 중 한 명이 존 웨슬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후, 웨슬리는 존 필모어(John Pilmore)와 리처드 보드만(Richard Boardman)이라는 두 명의 선교사를 보내 미국에서 모이던 다양한 감리교 단체들을 감독하고 통합하도록 했다. 이것이 연합감리교회의 전신인 미감리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토대가 되었다. 

1770년 헥 부부는 엠버리와 함께 뉴욕 북부의 캠든(Camden)이라는 마을에 새로운 감리교회를 설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버라의 삶은 힘겨운 시기를 맞았다. 헥 부부는 당시 북미의 많은 감리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독립 혁명에 반대하는 국왕파(loyalists)였다. 폴 헥은 전쟁 중 잠시 영국군에 몸담기도 했고, 결국 부부는 캐나다로 피신해 다른 국왕파들과 함께 온타리오에 정착해야 했다. 바버라의 열정은 여전했고, 그녀는 캐나다 최초의 감리교 공동체를 설립하는 데 일조했다. 그녀는 1784년에 눈을 감았다.[6]

바버라 헥과 그녀의 공동체가 뉴욕에서 감당했던 일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녀가 시작한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스트리트연합감리교회(John Street UMC)에서 모이고 있으며, 이 교회의 성공적 사역은 웨슬리가 미국에 감리사들을(superintendents) 보내 바버라의 신도회와 여러 다른 신도회들을 통합하여 미감리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조직하게 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만일 바버라 헥이 없었다면, 감리교회가 미국에서 생존하고 번영하여 19세기 영국을 대신하여 감리교의 중심지로 우뚝 서는 일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연합감리교회는 여전히 헥이 몸소 보인 본에 기대어 서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녀를 감리교회의 숨은 영웅 중 하나로 기리는 이유다.

콘텐츠는 2023 10 31, UMC.org 의해 제작되었습니다. 필립 J. 브룩스는 연합감리교 공보부의 작가이자 콘텐츠 개발자입니다. 이메일 보내 연락하세요.


[1] “바버라 헥의 역사”(The History Of Barbara Heck). Victoria United Church. Prescott, Ontario.

[2] “미국 내 감리교 운동의 시작"(Methodism’s Arrival in America). General Commission on Archives and History for The United Methodist Church.

[3] 총회 결의문집(The Book of Resolutions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2016). Nashville: Abingdon Press, 2016. Resolution #3062.

[4] Russell, Richey E. and Rowe, Kenneth E. 미국 감리교 운동(The Methodist Experience in America: A History Volume 1). Nashville: Abingdon Press, 2010.

[5] 같은 책.

[6] “바버라 헥의 역사”(The History Of Barbara Heck). Victoria United Church. Prescott, Ont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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